외부 전문가 칼럼
국제유가 급락, ‘D(Deflation)의 공포’ 불러오나?
2020.03.31 | 윤진식

 

국제유가가 3월 30일(미국 현지시간), 하락세를 지속하며 지난 2002년 2월 이후 18년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급락하는 국제유가에 따라 국내 제품 가격도 인하되는 추세다.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제품 가격의 경우 세전 기준 올해 1월 첫째 주 리터당 평균 605.2원에서 3월 셋째 주 평균 414.12원으로 31.6%나 하락*했다.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휘발유 소비자 가격이 1400원대인데 414.12원과의 차액인 나머지 1천원 가량은 유류세 등의 세금으로 유가가 오르든 내리든 불변의 것이다.

 

국내 휘발유 가격 책정 기준이 되는 국제 휘발유 가격도 자유낙하(Free fall) 중이다. 국내 휘발유 가격은 국제 휘발유 가격에 2~3주 가량 시차를 두고 반영**되는데 국내 휘발유가 31.6% 하락하는 동안 국제 휘발유 가격(2019년 12월 셋째 주~2020년 3월 첫째 주)은 배럴당 70.66 달러에서 56.24 달러로 20.4% 하락했다.

(**)국내 휘발유(석유제품) 가격은 국제 원유 가격이 아닌 싱가포르 현물 시장에서 거래되는 국제 휘발유(석유 제품)의 가격, 환율 등의 변수를 2~3주 가량의 시차를 두고 반영된다.

 

 

| 유가 급락,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원유를 전량 수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선 유가 하락에 따른 혜택이 훨씬 많아 보인다. 기업의 비용 부담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소비자는 유류 관련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긴다. “유가 급락이 과연 축복일까?”

 

이번 유가 급락이 시장경제이론에 따른 수요와 공급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경제에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유가 급락은 ‘전쟁’에 의한 것이라 다른 측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국제경기 관점에서 우려의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유가는 국제경기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국제경기는 결국 우리나라 경제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많은 경제학자와 관련 기관들이 유가 추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미실물경제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Business Economics, NABE)가 미국의 경제전문가 2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가 2021년 말 내에 미국의 경기 침체가 올 것이라 전망했다. 재닛 옐런 前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지난해 11월, 뉴욕에서 열린 월드비즈니스 포럼에서 미국 경기침체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이유가 있다(There is good reason to worry)’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 또한 “다음번 경제 위기는 내 생애 최악의 경제위기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발언들은 ‘팬데믹***’이 선언된 코로나19라는 ‘블랙스완****’ 출현 이전에 나왔다. 이 우울한 전망들이 블랙스완으로 실현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우려가 높아지는 와중에 유가 전쟁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저유가가 글로벌 경제 불황을 초래할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팬데믹: 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블랙스완: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월가 투자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그의 저서 ‘검은 백조(The black swan)’를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언하면서 두루 쓰이게 됐다. -출처: 시사경제용어사전

 

 

| D의 공포, 실현되나?

 

관련업계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원유 생산 원가는 배럴당 10달러 이하, 러시아는 17달러, 미국(셰일오일)은 30달러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유가 급락으로 가장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은 원유 생산 비용이 높은 미국이다. 최근 미국 증시에서 폭락을 주도했던 것도 에너지 관련 종목들이었다.

 

셰일 관련 기업들이 조만간 연쇄 부도를 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미국 고위험·고수익(하이일드, high-yield) 채권 시장의 10% 이상을 에너지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어 금융시장의 뇌관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가 급락으로 셰일업체가 도산에 직면하면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전통 석유 메이저 석유업체가 인수에 나설 것이고, 기술력을 동원해 더 효율적으로 원유를 생산하게 될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도 따른다.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이 대거 부실화하면서 미국 신용위기를 촉발할 것이란 우려도 상존한다. CLO는 각 기업의 대출 채권을 담보로 금융회사들이 발행하는 자산유동화증권(ABS)*****의 일종인데, 셰일오일 등 기업 채권을 기반으로 많이 발행되어 있다.

(*****)자산유동화증권(Asset Backed Securities, ABS): 부동산, 매출채권, 유가증권, 주택저당채권 및 기타 재산권 등과 같은 기업이나 은행이 보유한 유 · 무형의 유동화자산(Underlying Asset)을 기초로 하여 발행된 증권 – 출처 : 시사경제용어사전

 

최근 미국 정부가 7천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양적완화 계획을 내놓고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까지 낮췄지만, 미국 에너지 섹터에 대한 불안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국 셰일 업체들의 연쇄부도가 현실화될 경우, 코로나19와는 별개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위 ‘D(Deflation,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실현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가의 자유낙하는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악재’라는 비관론과 함께 ‘우리나라 경쟁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낙관론이 존재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유가 하락은 장기적으로 실물 경제에 도움을 주지만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실 금융시장 교란보다 더 우려되는 건 디플레이션이다.

 

공급 요인뿐 아니라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요가 줄어든 점도 현재 유가 하락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저물가 상황에서 유가 하락에 따른 기업들의 생산비용 감소가 제품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게 되면 디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켜 경기를 침체시킬 수 있다.

 

유가 급락에 대해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가 좋은 시기에 유가가 낮아지면 비용 절감 요인이면서 기회가 되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경기가 안 좋고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에 상황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의 유가 전쟁이 끝나면 에너지 업계가 크게 재편되고 다시 유가가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셰일 업체나 생산 비용이 높은 전통 원유개발 기업들이 이 전쟁 기간 동안 문을 닫을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문을 닫는다고 유정(油井)도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

 

싼 값에 나온 기업을 누군가가 인수해 유가 회복의 열매를 딸 수도 있다. 국내 에너지 업계에도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기준 가격 하락폭보다 큰 제품가격 하락, 정제마진 악화 등으로 힘든 싸움을 펼치고 있다.

 

| 유가전쟁, 쉽게 끝이 날까?

 

이 대목에서 “유가 전쟁이 쉽사리 끝날 것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980년대 북해 유전이 개발될 무렵 사우디는 감산의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다. 당시 북해 유전이 발견된 뒤 유가가 급락하자 사우디는 1985년, 생산량을 75%나 줄이며 유가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가격 하락을 막지 못했고, 재정 적자만 쌓였다. 사우디가 이 적자를 회복하는 데 16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사우디가 이번 ‘치킨 게임******’에 나선 더 큰 이유는 달라진 시장 상황에서 비롯한다. 러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캐나다, 미국 등이 원유 공급 시장에 가세하면서 시장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치킨게임: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이론. – 출처: 두산백과

 

미국 등 고비용의 원유 생산 업체와 맞서 벌어진 1차 펌프전쟁이 한창이던 2014년, 알 나이미 사우디 석유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사우디가 감산에 나서면 유가는 회복되겠지만 러시아와 브라질, 미국의 셰일오일 업계가 사우디의 시장을 잠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유가 및 세계경기 흐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경제로서는 이러한 유가전쟁 동안 불안심리만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유가의 급등도 급락도 환영할만한 일은 아니다. 유가가 안정화되는 것이 우리로서는 가장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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