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빈이는 스물 일곱 살의 자폐 청년으로, 어릴 때 천재인 줄 알았던 아이입니다. 두 살 때 알파벳을 쓰고 세 살 때 모든 길을 외운 건 물론, 프랜차이즈 빵집의 상징인 에펠탑을 그렸거든요. 그리고 별명이 ‘대감마님’이었을 정도로 무지 점잖은 아이였답니다.
우리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종빈이가 네 살 되던 해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엄마, 아빠’라는 딱 두 단어만 말할 수 있었고, 자동차 바퀴나 기차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또 변화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자폐 판정을 받은 종빈이는 언어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했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온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종빈이가 음악과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건 여섯 살 때였습니다. 아이의 자폐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지요. 그런데 처음엔 너무나 잘 해주던 아이가 6개월 뒤, A현(String)에서 E현으로 넘어갈 때 바이올린을 던졌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거였고, 어쩔 수 없이 우리 가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더 숲(The SOOP)’이 생기면서 종빈이는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는 기적의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바이올린을 연습했습니다. 아침에 밥을 먹고 산책한 뒤 오전 9시쯤이면 어김없이 2층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중에 내어준 숙제를 그때 하는 것이었죠. 저는 종빈이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며, 음악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감격스럽게 맞이합니다.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하고 박수를 받은 아이는 올해 미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GMF(Great Music Festival) in USA’에 참가한 선샤인 보이즈(Sunshine boys)의 일원으로 함께해 연주도 했습니다. 종빈이가 연습한 오 마이 선샤인(Oh My Sunshine)은 제가 100번도 넘게 들었던 것 같아요.
연주를 끝내고 환하게 웃는 종빈이의 얼굴, 그리고 제 주변의 모든 분이 “잘 키웠다”며 축하 인사를 전했을 때 느껴지는 감격스러움까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SK이노베이션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음악과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연주하며 행복해하는 종빈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