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Report
국제 유가 급락으로 글로벌 경제 술렁··· 러시아·사우디 감산합의 실패, ‘유가전쟁’ 서막인가?
2020.03.11 | 윤진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등으로 원유 수요가 급감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감산 합의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국제유가가 1991년 걸프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하며,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증시가 대폭락하는 등 ‘대혼란’이 빚어졌다.* 전 세계 언론들은 코로나19 우려와 유가 폭락 악재를 ‘더블 펀치’라고 부르며 경기 침체 공포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시장에서는 이른바 ‘유가 전쟁 (oil price war)’의 서막이 올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3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시는 이날 주가 급락으로 거래가 일시 중지되는 ‘서킷브레이커’까지 발동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하루 기준 최대 낙폭으로 또 다른 ‘블랙먼데이’를 기록했다.

 

| WTI 가격 24.6% 하락해 31.13달러

 

지난 3월 9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WTI(서부텍사스산 원유)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10.15달러(24.6%) 급락한 31.13달러에 마감했다. 1991년 1월 17일 이후 29년 만에 가장 큰 하락률로 나타났다.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5월물 브렌트유도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10.9달러(24.1%)나 내려앉은 34.28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지난 6일, OPEC(석유수출국기구)과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회의에서 러시아 반대로 감산 합의에 실패한 사우디가 이튿날 전격적으로 석유증산과 원유공식판매가격(OSP)***을 배럴당 6~8달러 인하한다고 발표한 것에서 기인했다. 사우디의 이날 발표한 가격 인하는 20년 만에 가장 큰 폭이다.

 

해외 언론들은 “적절한 수준의 유가 하락은 경제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지만, 지금처럼 가뜩이나 코로나19 사태로 수요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사우디의 수출 가격 인하 조치가 러시아와의 ‘가격전쟁’ 조짐으로 해석되면서 불안을 증폭시켰다”고 분석했다.

(**) OPEC+ : 석유수출국기구회원 OPEC의 14개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10개로 구성된 주요 산유국 연합체

(***) OSP(Official Selling Price) :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의 정부 공시 원유 판매 가격

 

| 2020년 OPEC 회의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삼성선물의 김광래 연구원은 3월 11일 자 보고서에서 OPEC 회의에서 발생한 사우디와 러시아간 감산합의 실패와 관련한 막전막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먼저 “OPEC 맹주국인 사우디와 비OPEC 맹주국인 러시아 간의 불협화음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은 아니다”며 현 상황을 설명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적극적인 감산을 주도하며 생산 쿼터보다 많은 수준을 감산해왔던 사우디는 올해 1월부터 시행된 하루 170만 배럴 감산에서도 자발적으로 일일 40만 배럴의 추가 감산키로 약속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달랐다. 감산 이행을 매번 약속만 할 뿐 2017년 감산 합의 이후 실제 생산쿼터를 지킨 것은 단 두 달 밖에 없었다. 자국 내 수요 증가와 생산 차질 등을 빌미로 매번 공허한 약속만을 지속했다. 하지만 사우디는 러시아를 안고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비OPEC 국가들의 생산 증가와 OPEC의 감산 영향력 감소로 사우디 혼자만으로 세계 최대 카르텔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따라서 사우디는 감산에 대한 주변 OPEC 국가들의 의지가 흔들릴 때마다 혼자 독자적으로 추가 감산해 다른 국가들의 감산을 독려했다. 심지어 러시아에 콘덴세이트 집계를 면제해 주고 3년 동안 감산할 때 단 두 달밖에 생산 쿼터를 지키지 않았어도 별다른 제재 없이 넘어갔다. 이와 관련 김 연구원은 “사우디는 세계 2위 생산국인 러시아의 존재만으로도 OPEC+의 위엄이 어느 정도는 유지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그러나 “이번 OPEC 회의에서는 사우디의 태도가 다른 때와는 사뭇 달랐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OPEC 정례회의는 이틀간 진행된다. 첫날은 OPEC들이, 다음날에는 OPEC+가 회의를 진행한다.

 

사전 합의를 마치고 의례적인 회의를 거쳐 OPEC+ 최종 합의에 원만하게 도달했던 과거와는 달리 OPEC 국가들이 먼저 하루 150만 배럴 추가 감산안 (하루 100만 배럴은 OPEC, 50만 배럴은 비OPEC)에 합의를 한 뒤 러시아에게 공개적인 합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어 러시아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4월부터 각국들은 상황에 맞게 생산을 조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기존 170만 배럴 감산 기한 연장에도 선을 그었다.

 

| 국제유가를 대하는 자세, 사우디와 러시아가 다르다.

 

김광래 연구원은 이번 사태와 관련, “OPEC과 러시아는 유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OPEC 국가들의 평균재정 균형 유가****는 95달러에 달한다. 전체 세입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도 80~90% 이상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 재정 균형 유가는 40달러에 머문다. 원유 관련 세입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는 것이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 금년 재정 지출을 감안해 재정 수지를 0으로 맞출 수 있는 유가

 

그는 보고서에서 “OPEC의 경우 유가 지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 반면 러시아는 의존도가 높은 품목 중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러시아 외화보유액은 5,700억 달러로, 사우디 (5,000억 달러)보다 높고 사우디를 제외한 나머지 OPEC 국가들의 외화보유액을 모두 합해도 러시아의 외화보유액에 미치지 못한다.

 

재정균형 유가를 하회할 경우 OPEC 국가들은 국채매각이나 국영자산 매각 또는 외화보유고 소진 등을 통해 버텨 나가야 한다. 사우디와 UAE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재정상황이 매우 취약한 상황. 김 연구원은 “사우디의 원유증산 발표가 단순히 러시아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기 위한 겁주기 용인지, 본격적인 치킨게임의 시작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수준의 유가가 지속될 경우 러시아에게도 타격이 가해지겠지만 원유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사우디(원유 관련 수입이 전체 세입의 85%)를 비롯해 여타 취약국들(알제리, 콩고, 가봉, 적도기니 등)은 수개월조차 버티지 못하고 채무 불이행 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디와 러시아의 진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김 연구원은 덧붙였다.

 

 

| 과거 유가폭락 사례 통해 본 2020년 사태에서 정유화학업종 영향 분석

 

이번과 같은 유가 급락은 2000년 이후 몇 차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8년과 2014년이다. ‘09년 1월 두바이유는 배럴당 40달러를 하회하며 전년도 7월 고점 대비 70% 이상 급락했고, ‘15년 1월에도 배럴당 45달러로 떨어지며 전년도 7월 고점 대비 60% 이상 하락했다. 이번 유가 급락도 과거와 비슷할까.

 

교보증권 김정현 연구원은 3월 11일 자 보고서에서 “지난 2번의 유가 급락 사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08년에는 유가급락에도 화학 마진/정제마진 모두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나 ‘14년에는 원재료 절감에 따른 수혜를 시현하며 정유화학 업종의 대세 상승의 시작점이 됐다”며 두 사태의 차이점을 언급했다.

 

두 시기의 차이점은 유가 급락 계기/수요/공급(증설) 등의 측면에서 기인한다. ‘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급격한 수요 위축 우려로 유가가 급락했으나 ‘14년에는 미국의 쉐일 오일 등 비전통적인 에너지 생산이 증가하고 OPEC 회원국들의 감산 합의에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08년에는 화학 수요 성장의 대체 지표인 글로벌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나 ‘14년에는 원유 수요 성장과 경제성장률 모두 견조하게 유지됐다. 게다가 ‘08년에는 정유/화학 모두 증설 부담이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으나 ‘14년에는 신규 증설 부담이 크지 않았다는 것도 다르다.

 

김 연구원은 “이번 유가폭락 사태는 2008년과 2014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분석한다. 우선 최근 유가급락의 원인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수요 위축 우려 속에서 OPEC+의 감산 합의 실패가 동시에 작용했다는 점을 꼽았다. 3월 이후 글로벌 전망 기관들은 원유 수요 전망을 일제히 하향하고 있으며, OECD는 3월 이후 2020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 2.9%에서 1.5%로 낮추며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는 상황 때문이다. 그는 “정유/화학 업종에 관심이 있는 투자자들은 모두 알다시피 올해 정유/화학 업종의 증설 부담은 ‘08년, ‘14년보다 훨씬 크다”고 덧붙였다.

 

김정현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러시아와의 극적인 합의가 없을 경우 급락한 유가는 약보합을 유지하고 이는 정유/화학 업종에 모두 부정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OPEC+ 공조가 무너질 경우 미국 증산에 대응하여 글로벌 유가수급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우디는 4월 OSP를 배럴당 6달러 이상 공격적으로 인하하고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의 증산을 예고하는 등 러시아의 전략 철회를 위한 벼랑 끝 전술을 시도하고 있으나, 9일 러시아 재무부 장관은 배럴당 25~30달러 수준의 유가를 감수할 체력이 있다고 발표하며 강대강 모습을 보였다.

 

 

| 유가전쟁, 앞으로 어떻게 될까?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사우디와 러시아간 본격적인 ‘유가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러시아가 석유 감산에 반대하고, 공급 과잉 문제가 계속되면 세계 경제에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

 

미국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와 사우디가 당장의 갈등을 해결하더라도 세계적인 석유 과잉 문제는 수년간 유가를 낮게 유지할 수 있다”면서 “많은 소규모 미국 석유회사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고 더 큰 석유회사들은 수익을 보전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데 위험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의 키는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부 출혈을 감내하면서 현 상황을 유지할 지, 3월 감산 합의 종료 전 합의를 볼 것인지의 여부는 내부적으로 계산 중 일 것. 유가 하락을 지지해 왔던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급격하게 악화된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급감과 미국 내 지역 감염 통제에 힘을 써야 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올리는 전략이나 추가 제재를 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다.

 

김 연구원은 “4월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사우디의 극적 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만약 만남이 이루어 질 경우, 기존 감산 합의 연장 또는 추가 감산 합의에 나설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예상했다.

유가 전쟁의 향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사우디와 러시아의 합의 없이는 정유화학 업종 모두 저유가에 의한 가수요 부재, 실수요 부진, 신증설 물량 등 삼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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