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통상적으로 매년 두 차례 그 해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발표한다. 남반구를 위한 권고 발표는 겨울을 앞둔 9, 10월경에 이뤄지며, 이에 따라 독감 예방 백신(vaccine)이 생산된다. 백신을 맞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가장 흔하게 머릿속에 떠올리는 ‘예방 접종’은 주사기로 백신을 주입하는 것이다. 주사기 외에도 우리의 건강한 일상을 지키는 의료장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유화학의 산물이 한 축을 담당한다. 석유화학에서 파생된 플라스틱 제품들, 의료 현장에선 어떤 활약을 펼치고 있을까?
| 의료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의료용 플라스틱의 필요조건
주사기는 물론 의료용 장갑, 각종 튜브, 혈액이나 약물 주머니, 마스크 등 병원 곳곳에서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이 쓰인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의료장비/기기 및 제품에 활용되기 위해선 미국 식품의약청(FDA), 유럽 CE(Conformité Européene), ISO 13485* 등 엄격한 국제 규제 및 품질 기준을 충족해야만 한다. 이를 위한 의료용 플라스틱의 대표적인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다.
(*) ISO 13485 :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발행한 의료기기 품질 관리 시스템(QMS) 관련 국제 표준을 말한다.
첫째, 생체적합성(Biocompatibility)이 중요하다. 플라스틱이 인체 내에 삽입되거나 몸에 닿는 동안 면역 반응이나 알레르기, 염증 등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 방사선, 열, 화학물질 등을 이용한 멸균 과정을 견디는 것은 물론, 의료품 사용 중 변형되거나 손상되지 않는 내구성(Durability)을 가져야 한다. 셋째, 병원에서는 각종 약품, 소독제가 자주 사용되기에 그와 접촉해도 특성이 변하지 않는 화학적 안정성(Chemical Stability)이 뛰어나야 한다. 또한, 주사기나 수액 백(bag) 등에는 투명성(Transparency)이 요구된다. 이는 약물이나 혈액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 외에도 무독성(Non-toxicity), 열 안정성(Thermal Stability), 가공 용이성(Processability) 등을 충족해야 한다.
| 몸속 장기가 된 플라스틱, 삽입형 의료기기
체내 삽입형 의료기기 중 하나인 인공장기는 고분자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진다. 현대의학의 놀라운 성과인 인공장기는 주로 석유화학의 산물인 플라스틱 소재와 금속, 세라믹(Ceramic) 등을 혼합해 제작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장기는 인체에 무해하고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며 장기간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 미래 의료기술의 핵심 분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 몸속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소재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걸 꼽자면 ‘실리콘(Silicone)’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폴리디메틸실록산(Polydimethylsiloxane, PDMS)이다. 폴리실록산의 일종인 PDMS는 흔히 실리콘으로 불리며, 생체적합성이 뛰어나 인공 유방 보형물의 주요 재료로 쓰인다. 폴리우레탄(Polyurethane, PU) 또한 우수한 내구성과 유연성으로 인공심장, 인공혈관 등을 제작하는 데 사용된다.
고밀도 폴리에틸렌(Ultra-high-molecular-weight polyethylene, UHMWPE)은 튼튼하고 높은 마찰 저항성으로 쉽게 닳지 않아 무릎 및 고관절을 대체할 인공관절 소재로 쓰인다. 그 밖에도 폴리메틸메타크릴레이트(Polymethyl Methacrylate, PMMA)는 뼈나 치아를 고정시키는 접착제로 사용되며, 투명도가 높고 굴절률도 좋아 하드 콘택트렌즈나 인공수정체(Intraocular Lens, IOL)의 재료로도 쓰인다.
| 재능을 살려 병원에서 활약하는 플라스틱 소재
한편, 의료진과 한 몸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의료 장비에도 내구성, 경제성, 멸균처리의 용이성 등 여러 장점을 가진 플라스틱 소재가 활용된다.
주사기는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으로 만들어지는 바늘을 제외한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이뤄졌다. 충격에 강하고 투명도가 높은 폴리프로필렌(Polyprolylene, PP)은 일회용 멸균 주사기의 몸체, 피스톤 등 여러 부분에 쓰인다. 아울러 PP는 주사기를 비롯한 수술 도구를 멸균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한 의료 포장재 등에도 폭넓게 쓰인다.
폴리염화비닐(Polyvinyl Chloride, PVC)은 투명하고 유연해서 수액이나 혈액을 담는 정맥주사용 IV백(Intravenous bag)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다. PVC는 약물과 화학물질에 저항성이 높고 멸균 처리 과정을 잘 견디며, 상대적으로 저렴해 대량 생산에도 유리하다.
높은 강도와 내구성을 가져 물리적 충격에 강한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 PC)는 의료진의 눈을 지키는 의료용 보호안경이나 얼굴 전체를 보호하는 페이스 실드(Face shield)에 많이 사용된다. 또한 화학 물질, 고온에 대한 저항성이 높아 멸균 및 소독 과정에서도 변형이나 손상이 적어 약품 용기에도 활용된다.
백신은 감염병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 우리가 건강한 삶을 누리는 데 중차대한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백신이 안전하게 전 세계에 전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플라스틱의 발전 덕분이다. 최근에는 플라스틱과 3D프린팅 기술이 결합된 환자맞춤형 의료기기/삽입형 보형물 등 개개인의 필요에 맞는 의료장비가 등장하며 의학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다. 미래에도 인류의 삶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놀라운 의료 기기가 출현할 것이고, 그 중심에는 고성능 플라스틱과 의학, 그리고 과학기술의 융합이 자리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