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의 진한 감동을 만드는 영화 속 숨은 조연, 석유화학제품
2024.11.26
2023년 여름에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 참여했던 동명의 한 물리학자의 일대기를 담았다. 이 작품은 전기(傳記) 영화라는 장르의 특수성과 3시간을 넘는 긴 상영시간의 한계를 넘어, 전 세계에서 9억 5천만 달러(약 1조330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흥행 뒤에는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촬영 방식을 고수하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er Nolan) 감독의 연출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놀란 감독은 수정과 편집이 용이한 디지털 촬영 대신 전통적인 필름을 사용하며, CG(Computer Graphics, 컴퓨터 그래픽스)보다는 초대형 규모의 세트장을 직접 짓는 등 실사 촬영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국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필름을 고집하는 이유는 필름의 화질과 질감이 인간의 눈이 보는 것과 비슷하게 세상을 포착하기 때문”이라며, “나는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의 감각을 느끼길 바라기에 시각효과에 적용해 최대한 실제로 찍으려고 한다. 이는 그래픽보다 더욱 공감되고 실제적이고 위협적이며 무게감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필름의 역할을 빼놓고 영화 역사를 논할 수 없다. 필름이 없었다면 영화 제작이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영화는 지금처럼 대중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 한 편이 완성되고 상영되기까지, 영화의 든든한 지지대가 된 석유화학 기술을 살펴본다.
| 불타는 필름에서 불멸의 필름으로! 석유화학에서 비롯된 영화 필름의 변천사
1869년, 미국의 인쇄출판업자인 존 하이엇(John Wesley Hyatt)이 녹나무에서 추출한 장뇌(樟腦)를 활용한 최초의 플라스틱, 셀룰로이드(Celluloid)를 개발했다. 이를 기반으로 상업용 롤 필름인 나이트레이트(Nitrate) 필름이 1889년 발명됐으며, 투명하고 유연한 성질로 영화산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문제는 인화성(引火性)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극장이나 필름 보관시설의 화재를 초래할 수 있고 자연 발화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1937년 미국 뉴저지(New Jersey)州 리틀 페리(Little Ferry)에 위치한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社의 영화 필름 보관소와 1965년 캘리포니아(California)州 컬버 시티(Culver City)에 소재한 MGM社의 보관소에서 나이트레이트 필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초기 영화의 수많은 필름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닌 나이트레이트 필름의 대체재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 아세테이트(Acetate) 필름이다. 이 필름은 불연성(不燃性)∙난연성(難燃性)이라는 특성을 가져 ‘안전필름(Safety film)’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습기와 열에 큰 영향을 받는 단점이 있었다. 화재에서 대해서는 보다 안전해졌지만, 코를 찌르는 듯한 식초 냄새가 특징인 화학적 분해 현상인 ‘초산화 증후군*’이 발생하면서 필름이 망가지곤 했다.
(*) 초산화 증후군(Vinegar Syndrome): 필름 베이스층 내의 아세테이트 이온이 공기 중의 물과 반응해 초산을 생성하는 화학적 분해 현상. 식초와 같은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며, 이로 인해 필름이 건조되고 수축하면서 균열이 발생해 손상을 입는다.
필름의 혁명은 1960년대경 등장한 폴리에스터(Polyester) 필름이 이뤄냈다고 보는 시작이 지배적이다. 높은 내구성(耐久性) 및 내열성(耐熱性), 내화학성(耐化學性) 등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폴리에스터 필름은 장기간 보존이 가능해, 영화 유산을 후대에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믿음직한 매체로 평가받고 있다.
| 수중 촬영부터 좀비 분장까지, ‘리얼’한 장면에 숨겨진 촬영장의 비밀
카메라와 조명, 반사판 등 영화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들 역시 대부분이 플라스틱 제품으로 이뤄진다.
특히 ‘탄소섬유강화 플라스틱(CFRP, 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은 촬영 장비의 경량화를 통해 영화 작업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핵심 소재다. 플라스틱에 탄소섬유 코팅을 입힌 CFRP는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아 카메라를 고정하는 리그(Rig), 흔들림을 줄이는 짐벌(Gimbal) 등 카메라 보조장비로 널리 사용된다. 이를 통해 촬영 현장의 기동성과 편의성이 크게 향상됐다.
수중 촬영에서는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가 빛을 발한다. 이 투명하고도 견고한 소재로 만든 카메라 하우징(Housing) 덕분에 수압 등으로부터 카메라를 보호할 수 있게 됐고, 물속에서도 안전하게 고품질 촬영이 가능해졌다.
특수효과도 석유화학산업의 몫이다. 판타지 세계를 눈앞에 옮겨 놓은 듯 사실감을 주는 첨단 시각효과(VFX, Visual Effects)를 위해 배우들은 초록색이나 파란색 배경판 앞에서 연기해야 한다. 그린 스크린(Green screen) 혹은 블루 스크린(Blue screen)으로 불리는 이 배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균일한 색상과 빛 반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석유화학 소재 기반의 특수 페인트가 사용된다.
좀비 분장이나 상처, 노화 표현의 사실감은 합성 라텍스(Latex)를 활용해 한층 더 생생하게 구현한다. 가볍고 강도가 높은 라텍스는 다양한 피부 주름을 표현하기에 그만이다.
| 스크린 그 너머, 석유화학이 투영(投影)하는 새로운 세계
극장에서 영화를 보려면 화면은 밝고 주변은 어두워야 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산업 초기에는 천에 은이나 알루미늄처럼 반사가 잘되는 금속입자를 발라 스크린으로 사용했고, 이를 은막(Silver screen)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주로 폴리에스터, PVC(Polyvinyl Chloride) 소재의 대형 스크린이 은막을 대신한다. 이 소재들은 빛 반사율을 최적화하고 색감을 선명하게 표현해 관객들이 생동감 넘치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필름과 디지털 상영 모두에서 뛰어난 화질을 제공한다.
웅장하고 입체적인 음향 효과는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폴리프로필렌(Polypropylene)으로 제작된 콘 스피커(Cone speaker)와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폴리우레탄(Polyurethane) 방음재가 시너지를 내 최상의 음향 환경을 만들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2010년 개봉한 《인셉션(Inception)》에서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통해 “모든 것을 뒤바꿀 단순하고 작은 생각(A simple little idea that would change everything)”의 힘을 얘기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하는 영화 본연의 힘. 여러분도 그런 ‘인생 영화’가 있는가? 창작자의 무한한 상상력이 스크린 위에 실현되고, 이렇게 탄생한 영화는 우리에게 감동과 울림을 선사한다. 사전적 의미로서 영화가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이유는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적 요소들이 합쳐져 표현된다는 것과 기술적 요소, 특히 다양한 기계공학적 표현도구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영화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석유화학의 발전이라는 단어도 하나 추가해 봄 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