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6
3개월 동안 원유 가격이 4배가 올랐다. 공장이 멈추고 가정에선 난방을 할 수조차 없었다. 미국 메릴랜드州의 한 주유소에서는 기름을 사려는 사람들이 무려 8km 남짓 줄지어 섰다. 수급 난항에 급기야 기름 사수를 위한 폭력사태도 일어났다. 주유소들은 기름이 있으면 녹색, 없으면 빨간색 깃발을 내걸기도 했고 차량 번호판이 짝수면 짝수일자, 홀수면 홀수일자에 주유를 할 수 있게 하는 홀짝 배급제도 도입됐다. 50년 전 있었던 제1차 석유파동(Oil Crisis)이 빚어낸 이야기다. 1973년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였다.
| 에너지 위기 속 빛나는 비축유의 역할
제1차 석유파동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뼈저리게 깨달은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1974년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가 설립됐고 미국, 독일(서독), 영국, 캐나다, 스페인 등 당시 16개 OECD 회원국들이 에너지 위기 상황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 2002년 3월, IEA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이 글로벌 협력에 동참했다.
IEA는 설립 이후 전략 비축유 방출을 통해 에너지 위기 극복과 시장 안정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1991년 걸프(Gulf) 전쟁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쿠웨이트의 유전이 파괴됐다. 이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의 일환으로 석유 금수조치(禁輸措置)를 내렸다. 이로 인해 발생할 석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IEA는 약 1,700만 배럴에 달하는 첫 전략 비축유 방출을 단행했다. 이후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입은 피해로 미국과 멕시코의 원유 생산시설이 마비됐을 때는 약 6,000만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하며 위기를 완화했다. 또한 2011년 일어난 제1차 리비아 내전으로 주요 산유국 중 하나였던 리비아에서의 원유 생산이 중단되면서 IEA는 6,000만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IEA 회원국의 일원으로 340만 배럴을 지원하며 국제 협력에 기여했다.
| 석유 비축, 어디서 어떻게 이뤄질까?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고, 시장 변동성에 대비하기 위해 석유 비축은 크게 ‘재고 보유 계약’과 ‘저장 시설 보관’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재고 보유 계약
‘재고 보유 계약’은 일정량의 석유를, 계약을 통해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시장 변동성에 대비하고, 비상 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된다. 석유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계약 증표를 일명 ‘티켓’이라고 부르며, 구매자는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합의된 금액을 지불하고 석유를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이 방식을 이용할 경우에는 저장 시설을 직접 운영하지 않고, 대신 민간 기업과 계약을 맺게 된다. 이는 정부가 석유를 저장하는 부담을 덜 수 있고, 민간 부문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 저장 시설 보관
재고 보유 계약의 경우 저장시설을 짓지 않아 건설비용이 절감돼 경제적으로 석유를 보유할 수 있지만, 실물 석유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여러 국가의 정부는 석유를 보관할 수 있는 지상탱크(지상비축기지)와 지하동굴 저장소(지하비축기지)과 같은 석유 저장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통상 원유의 경우 560만 배럴 이하를 보관할 경우에는 지상탱크가, 560만 배럴 이상일 경우에는 지하동굴 저장소가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상탱크는 공사기간이 약 3~5년으로 빠른 건설이 가능하고 시공 및 시설 확장이 용이하지만, 일반적으로 지진 등 자연재해에 취약하고 수명이 약 15년 내외로 짧은 편에 속한다.
반면 지하동굴 저장소는 수백 미터 깊이의 지하 소금층이나 암반층에 만들어져 충격과 온도 변화에 강하고, 40년 이상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 또한 해저면 아래에도 건설할 수 있어 공간 활용도가 높고, 대규모 저장에 적합하다.
|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석유산업 변화 및 비축의 역사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조선 말기, 인천 월미도 인근 해안에 조선 최초의 석유 저장소가 세워졌다. 미국 최대의 석유기업이었던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社와 조선 내 석유 수입 독점 계약을 체결한 타운센드 상회(Walter Davis Townsend)가 1897년, 월미도 동쪽 해안 부근에 등유 50만 상자를 저장할 수 있는 석유저장창고를 지은 것이다. 이 저장소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남산만한 서양 기름통’이라 불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렇게 수입된 조선 최초의 석유는 당시 ‘솔표’, ‘승리표’라는 상표를 붙이고 나무 상자에 담겨 조선 전역에 팔렸다.
이후 조선의 석유 시장은 기존의 독점 체제에서 영국의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등 여러 나라의 기업들이 뛰어들며 치열한 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며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석유 비축과 정유시설 건설에 나섰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35년 ‘조선석유’를 설립한 것은 물론, 1938년 완공된 원산정유공장에서 연간 30만 톤의 석유를 생산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내 석유제품의 공급은 美 군정청 산하 석유배급 대행회사(PDA, Petroleum Distribution Agency)가 담당하며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SCO, Korea Oil Storage Company)가 설립돼 석유제품의 저장 및 판매를 주관했고, 6·25 전쟁이 일어나며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한 석유기업이 철수하면서 석유제품을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는 증가하는 석유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1955년, 미국과 석유운영협정을 맺어 안정적인 석유 공급의 기반을 마련했다. 6·25 전쟁의 여파로 산업 기반이 전무했던 1962년 10월 13일, 국내 최초의 정유회사인 SK이노베이션(당시 대한석유공사)이 출범했다. 대한민국 석유화학산업의 신화를 이룩하고 경쟁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온 SK이노베이션이 내디딘 첫 걸음이었다.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한 이후 우리나라는 에너지 비상사태에 대응하고자 1978년, 서울 상암동 매봉산에 다섯 개의 오일탱크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석유비축기지인 ‘마포 석유비축기지’를 지었다. 현재 국내에는 총 9개(구리(1981년), 울산(1981년), 거제(1985년), 평택(1989년), 용인(1998년), 여수(1998년), 곡성(1999년), 동해(2000년), 서산(2005년))의 석유비축기지가 존재한다.
‘마포 석유비축기지’는 1978년 설립 당시 서울시민이 1개월 정도 소비 가능한 약 6,907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었으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안전 상의 이유로 폐쇄됐다. 그러나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현재의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했다.
석유비축기지 내 비어 있던 야외공간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야외마당이 되었다. 더불어 지름 15~38m, 높이 13~15m에 달하는 오일탱크는 강의실, 회의실, 카페테리아 등 시민들의 커뮤니티 센터로 탈바꿈했다. 특히 경유를 보관하던 오일탱크는 야외무대와 공연장으로, 휘발유를 저장하던 오일탱크는 전시 및 워크샵이 열리는 다목적 공간의 파빌리온(Glass Pavilion)으로 변신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석유 비축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 속에서 안정성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으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은 국가 경제와 민생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과제다. 특히 세계 4위의 원유 수입국인 대한민국은 글로벌 유가변동 등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축유와 더불어 에너지 안정성 확보에 기여하는 것은 자주원유개발이다. 국내 업체들도 단순한 지분참여에서 직접 운영권을 확보하는 형태로 변화해 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개발 자회사 SK어스온이 중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지의 광구에서 운영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다. 불확실한 변화에도 흔들림이 없기 위해선 내일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해두는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비축유 기지들과 해외 자주원유 광구들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