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갖게 된 이후부터 인류에게 어둠은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번개나 화산활동 등으로 인해 발생한 불을 얻어낸 인류 초기, 그리고 동물의 지방을 연료로 석등에 불을 지폈던 시기 등을 지나 고대 로마와 페르시아에선 올리브 오일 등 식물성 기름을 이용해 등잔에 불을 피웠다.
1820년 11월 20일, 미국의 포경선 ‘에식스호’가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아 태평양 한 가운데서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실화는 1851년에 출판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작, 소설 ‘모비딕(Moby-Dick)’의 모티브가 됐다. 그 당시 향유고래에서 짜낸 기름은 등잔, 양초 등 불을 밝히는 재료로 사용됐고, 향유고래 한 마리를 포획하면 약 1만 리터 이상의 고래기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포경업은 성황이었으며, 무분별한 남획으로 고래가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 시절 고래를 구한 것이 있었으니!
| 세계 곳곳의 정제 기술이 가져온 등유(燈油)의 대량 생산
우리가 사용하는 오늘날의 등유를 만든 사람은 캐나다의 지질학자 에이브러햄 게스너(Abraham Pineo Gesner)다. 그는 1846년, 석탄을 가열해 기름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증류한 기름은 불을 붙여도 연기가 발생하지 않았고, 양초 약 10개가 낼 수 있는 밝기의 빛을 낼 정도로 환했다. 게스너는 이 기름에 ‘케로신(kerosen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밀랍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케로스(kēros)’에 화학 접미사 ‘-엔(-ene)’을 결합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후 케로신은 등유를 칭하는 고유명사로 등극했다. 게스너는 1854년, 석탄과 같은 고체 탄화수소에서 등유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미국에서 획득했고, 이로 인해 등유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비슷한 시기, 영국과 미국에서도 등유 정제 기술이 등장했다. 스코틀랜드 화학자 제임스 영(James Young)은 1847년, 영국 더비셔주 알프레턴(Alfreton) 지역에 위치한 리딩스 광산(Riddings colliery)에서 자연적으로 석유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증류해 등유로 사용할 수 있는 기름을 얻어냈다. 이듬해인 1848년, 그는 석탄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원유 정제 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웨스트로디언주 배스게이트(Bathgate)에 최초의 상업적 석유 정제 공장을 설립해 파라핀 오일(Paraffin Oil)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영이 ‘제임스 파라핀 영(James Paraffin Young)’이라고도 불리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파라핀 오일은 현재의 등유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당시 불을 밝히거나 난방 등 등유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됐다.
한편 미국의 사업가인 사무엘 키어(Samuel Martin Kier)는 1840년대 암정(巖井, Salt well)에서 소금을 채취하던 중 불순물이 많은 검은색 기름덩어리가 나오는 걸 목격한다. 이 기름덩어리 즉, 석유는 당시 그에게 쓸모가 없었기에 그것을 펜실베이니아 운하에 버렸다. 그러던 도중 버린 석유의 막(油膜, Slick)에서 불이 붙는 걸 보게 됐고, 이후 펜실베이니아의 화학자와 함께 석유를 정제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키어는 미국 최초로 석유를 정제해 등유를 만든 것은 물론, 1853년 피츠버그에 미국 최초의 정유 공장을 설립하며 미국 석유산업의 할아버지(Grandfather of the American Oil Industry)라는 별칭까지 갖게 된다. 이후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가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에서 유정을 발견하고 ‘수직 굴착식 시추’를 사상 최초로 성공했다. 이로 인한 석유 상업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에서도 석유 정제를 통한 등유의 대량 생산 시기를 맞이했다.
동유럽인 폴란드에선 1853년, 약사 이그나치 루카시에비치(Jan Józef Ignacy Łukasiewicz)가 석유를 정제해 등유를 추출하는 데 성공하고 세계최초로 현대식 등유 램프를 개발했다. 1854년에는 이 등유 램프를 유럽 최초로 가로등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시대에 전 세계에 걸쳐 석유 정제 및 등유 추출 기술이 발전하며, 인류의 밤은 더욱 밝게 빛날 수 있게 됐다.
19세기 전 세계의 밤을 밝히는 데 일등공신을 하던 등유는 20세기 들어 그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다. 1879년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발명한 전구가 등유의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등유의 용도는 보일러나 석유난로와 같은 가정용 난방을 위한 기름으로 변모했다. 또한 높은 인화점(引火點)과 낮은 점도, 그리고 경제성 등의 장점으로 인해 등유는 항공기를 띄우는 에너지로 각광받게 된다.
| 등을 밝히던 기름에서 하늘을 나는 에너지로!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Alekseyevich Gagarin)이 탄 우주선 보스토크 1호(Восток-1). 이 우주선이 발사할 때 쓰였던 1단 로켓 엔진의 연료는 무엇이었을까? 유리 가가린을 지구 너머 우주로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바로 등유였다.
항공기는 10~15km라는 높은 고도에서 장시간 하늘을 날아야 한다. 따라서 항공유는 낮은 기압과 초저기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로 인해 항공유는 약 40℃의 높은 인화점과 저온에서도 잘 흐르는 낮은 점도를 가진 등유에 여러 첨가제를 넣어 만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항공유는 등유를 기반으로 만든 JET-A1이다. JET-A1은 저온·저압에서도 잘 증발하고 기포를 형성하지 않아, 압력의 흐름을 막는 증기폐쇄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쉽게 얼지 않고 연소량과 발열량이 뛰어나 오늘날 민간항공기의 대표적인 연료로 자리잡았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이 화두가 되면서, 항공유에도 ‘지속가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23년 11월, 유엔(UN)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는 항공 및 대체연료 회의에서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를 설정했으며, 유럽연합(EU)은 항공기 연료에 지속가능항공유(Sustainable Aviation Fuel, 이하 SAF)를 섞는 걸 의무화하기도 했다. ‘바이오 항공유’라고도 불리는 SAF는 폐식용유, 동물성 지방, 옥수수 생산 폐기물 등을 재활용해 ‘등유와 유사한 화학구조’를 갖도록 만든 친환경 연료다. 이러한 화학구조의 유사성 때문에 SAF는 일반 항공유와 혼합 사용이 가능하고 기존 항공기의 연료 장치나 설비를 바꾸지 않아도 되며, 탄소배출량까지 감축할 수 있어 각광받는다.
어둠을 밝히던 등유는 여러 세기를 거쳐, 이제 수천 피트(ft) 상공을 날아다니는 항공기의 동력이 됐다. 항공기를 날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된 것이다. 미래의 등유는 하늘을 넘어 또 어떤 용도로 우리의 삶을 밝혀줄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