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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食] ‘미라’ 제조법의 핵심 비결이 석유?
2024.05.27 | SKinno News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승을 떠난 영혼은 죽음의 신, 오시리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며 이승에서의 죗값에 따라 저승에서 부활해 영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망자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는 것은 명계(冥界)에서 부활하기를 기원하기 위함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역청(瀝靑, Bitumen)’을 활용했다. 역청은 천연 아스팔트로, 석유가 지표면에 새어 나와 웅덩이를 이룬 뒤 휘발성 물질이 증발하고 남은 것을 말한다. 이를 활용해 시신에서 수분을 제거하고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로 사용한 것이다.

 

| 수메르에서 로마까지, 석유로 빚은 문명의 시작

 

석유는 인류 문명 발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해(死海)에서, 로마인들은 호수에서 천연 아스팔트를 발견하며 자연스레 그 존재를 알게 됐다. 특히 오늘날 주요 산유국이 밀집한 페르시아만 일대에선 과거 역청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기원전 3천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은 석유에서 나온 아스팔트를 재료로 조각상을 제작했고, 고대 로마 시대 때에도 도로 건설은 물론 지붕 및 배의 방수를 위해 석유를 활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 밖에도 바빌로니아는 유프라테스 강이 범람할 때마다 성 안으로 강물이 들이차곤 했는데,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성벽 안팎에 역청을 녹여 발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에도 바빌로니아 유적지에 가면 도로 위에 말라붙은 역청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바빌로니아인들이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역청을 발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역청이 언급된다. 이에 따르면 노아가 거대한 방주를 만들 때 배의 방수와 접착을 위해 역청을 사용했다거나, ‘바벨탑(Tower of Babel)’을 건설할 때 벽돌과 진흙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역청을 섞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좌) 에드워드 힉스(Edward Hicks), ‘노아의 방주(1846)’ (출처: 위키피디아) / (우)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바벨탑(1563)’ (출처: 위키피디아)

| 동서양을 막론하고 석유가 만병통치약?!

 

역청은 페르시아어로 ‘무미야(mūmiyâ)’라고 했으며, 이 단어에서 앞의 세 글자 ‘멈(mūm)’은 왁스(wax)를 뜻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집트인은 역청을 방부제로 활용해 미라를 싸는 천에 발라 시체의 부패를 막았다. 이렇게 방부처리한 미라(시체)를 아랍에선 ‘무미야(mūmīya)’라고 불렀다. 무미야를 감싼 붕대에 희귀한 허브와 약재 등을 역청과 함께 발랐는데, 역청을 일컫는 페르시아어 ‘무미야(mūmiyâ)’와 미라를 뜻하는 아랍어 ‘무미야(mūmīya)’. 이렇게 두 단어가 비슷하다 보니 11세기 이후 이집트 문명을 발견한 서유럽인들은 미라와 미라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물질을 통칭해 ‘머미(Mummy)’라고 불렸다는 설이다. 그 후 방부처리된 미라 자체에도 약효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당시 ‘미라에서 긁어낸 가루’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대부분의 집에서 구비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석유가 노인들의 치아 치료를 비롯한 질병 치유 목적으로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고대 페르시아인과 10세기 수마트라인 역시 석유의 약효를 믿었다고 하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도 석유를 통풍 치료제로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좌) 마르코 폴로 사후 1496년 재출간된 ‘동방견문록’ 번역본 (출처: 위키피디아) / (우) 17세기 미국 석유정제산업을 창립한 ‘사무엘 키어(Samuel Martin Kier)’의 석유 연고 (출처: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카스피해의 유전(油田)인 ‘바쿠(Baku)’를 언급하며 “먹지는 못하지만 불에 타고, 사람과 낙타의 상처난 곳에 바르면 약효가 좋다”고 밝혔다. 더불어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석유를 민간요법의 일환인 치료제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17세기 미국의 석유정제산업을 일으킨 사무엘 키어(Samuel Martin Kier)는 석유를 약으로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목격한 후 바셀린과 같은 젤리 타입의 연고를 개발했다. 오늘날 석유가 아스피린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약과 연고로 개발되기 이전부터 인류는 약으로써의 효용가치를 일찌감치 발견한 셈이다.

 

| 치열한 전쟁 속, 뜨거웠던 석유의 활약상

 

한편, 석유가 무기로 쓰였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기원전 480년경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석유를 적신 천으로 화살촉을 감싸 불화살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중국에서는 5대 10국 및 송나라 시대(10세기 초반)부터 ‘맹화유궤(猛火油櫃)’라는 화염병기의 연료로 석유를 활용했다고 알려진다. 송나라 시기의 유명한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는 이 무기의 제작과 사용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맹화유궤는 물을 부어도 불이 꺼지지 않고 맹렬히 타올라 끊임없이 불이 나오는 궤짝으로, 오늘날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Naphtha)가 주성분이었다고 추정된다.

 

1044년 송나라 병서 ‘무경총요’에 실린 맹화유궤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 고래잡이 대신 석유 시추! 고래의 멸종을 막은 석유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 이전인 1850년 전후다. 그전에는 등불을 밝히기 위해 아마씨유나 올리브유 등 식물성 기름을 주로 썼고, 고래 기름 역시 중요한 연료였다. 특히 향유고래의 머릿골에서 짜낸 기름인 ‘경뇌유(鯨腦油)’는 윤활유가 가져야 할 최적의 조건을 갖춰 산업혁명기 당시 기계 윤활유로도 널리 쓰였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딕(Moby Dick)’이 출간된 것도 1851년, 그 시점이다. 미국 문학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거대한 향유고래와의 사투 이야기는 향유고래에게 공격당해 침몰한 포경선 ‘에섹스’호 사건과 고래잡이배 선원이었던 작가 자신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무분별한 남획으로 고래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고래 기름 가격 또한 점차 상승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석유다. 새로운 연료원이 필요해진 사람들은 석유산업을 주목했다. 마침내 1859년, 미국 필라델피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미국 최초의 상업용 유전을 개발하며, 고래잡이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아졌다. 결과적으로 석유가 멸종위기에 처한 고래를 구해낸 셈이다.

 

1830년대 발행된 남태평양 고래잡이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건축, 의학, 무기, 연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핵심 에너지원 석유! ‘에너지食’ 다음 편에선 현재의 석유 채굴방식에 이르기까지의 발전 과정을 자세히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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