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S 2022’의 SK 전시관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Green Forest Pavilion)’의 2구역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전경
천재 엔지니어이자 미국 최대 군수회사의 최고경영자(CEO) ‘토니 스타크’가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 ‘아이언맨’으로 거듭나는 과정에는 뼈저린 자기반성이 있었다. ‘제리코’라는 새로운 무기를 시연하러 아프가니스탄을 찾은 토니는 한 무장단체에 테러를 당하고 납치된다. 당시 토니 옆에 떨어졌던 미사일에는 ‘스타크인더스트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과학과 사업으로 미국의 공영과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여기던 토니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5~7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2’에 ‘넷제로(Net Zero)’를 주제로 참가한 SK 전시관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Green Forest Pavilion)’을 거닐며 자꾸 옛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SK의 이번 전시 테마가 영화 속 지구를 지키는 슈퍼히어로의 임무처럼 ‘지구를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등산 숲길을 모티프로 했다는 독특한 콘셉트의 전시관은 환경이나 SK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 들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오픈형 전시관이 아니었음에도 개막일에만 3,000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한다. SK 전시관 방문자에게 제공된 ‘동행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관람객을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미국 현지에서 코로나19 일일 확진자가 100만 명을 넘어서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SK의 비전을 알리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촘촘히 박힌 삼나무 모형이 장식된 오솔길이 인상적이다. 길을 돌아 들어가면 SK의 넷제로 달성을 위한 핵심 기술들이 소개됐다. CES 혁신상을 2개나 받은 SK온의 고성능 배터리 ‘NCM9’를 비롯해 데이터를 저전력, 고효율로 처리하는 SK텔레콤의 반도체 ‘사피온’이 기억에 남는다. 최근 떠오르는 신기술을 친환경 키워드로 엮으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SK텔레콤의 메타버스(가상현실) 플랫폼 ‘이프랜드’를 소개하면서 SK 전시관 관계자는 “필연적으로 탄소를 발생시키는 이동·출장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 ‘CES 2022’ SK 전시관을 입장하기 위해 대기 중인 관람객들
친환경은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까. 혁신의 격전장에서 SK가 던진 화두다. 지구에 부담을 주는 것에서 인류문명은 시작됐다. 산업과 환경은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SK는 앞으로 그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돈을 벌겠다고 한다. SK가 던지는 그린 비즈니스 비전은 문명 이후 쌓인 인간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그래서 다소 추상적이고 아리송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CES 2022에서 SK가 선보인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은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한 흔적이다. SK이노베이션은 2030년 기준 매년 각 사업 영역에서 탄소를 1,100만 톤이나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 국민 88만 명 이상이 매년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규모다.
이는 SK그룹의 뼈저린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SK이노베이션의 모태는 대한석유공사이고 자회사 SK에너지는 여전히 국내 1위 정유사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반도에서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으로 만드는 정유사업으로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석유가 지구와 인류에게 주는 부담은 당시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피해가 누적되고 인류가 더는 이런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SK이노베이션은 포기보다는 도전을 택했다. 완전히 새로운 영역인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진출하고, 석유개발(E&P) 사업의 비전을 바꿔 친환경 이산화탄소포집·저장(CCS) 기술을 선보이는 이유다.
다행히 SK그룹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상 최초 코로나19 팬데믹 속 열린 CES에 참가한 기업들은 기후위기와 바이러스의 도전에 맞서는 인류의 응전을 고민하고 있었다. ‘가전’ 박람회라는 말은 허울이 된 지 오래다. 푸드 테크에서는 대체육, 식물성단백질 등 먹거리 혁신으로 인간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모색했다. 시에라스페이스 등 스페이스 테크(우주기술)는 지구의 위기를 해결할 단서를 지구 밖에서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SK의 넷제로 비전도 이런 맥락의 연장선이다.
혹독한 반성 이후 이제 검은 옷을 벗어 던지려는 SK이노베이션은 지구를 지키는 ‘녹색 아이언맨’이 될 수 있을까. 일단 화두를 던지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성과다. 20세기 산업화에서 한국은 늘 후발주자였지만, 21세기 친환경 비즈니스에서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 지구를 아프게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지구를 살리는 길을 가는, SK를 비롯한 민간 기업들의 여정이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