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동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2024.12.19
엘리자베스 테일러, 록 허드슨, 제임스 딘이 출연하고, 제2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작품 「자이언트(Giant)」(1956). 이제는 반백 년을 훌쩍 넘는 고전 중의 고전이 돼버렸지만, 극 중 레슬리(엘리자베스 테일러 분)를 사모했던 청년 제트(제임스 딘 분)가 시추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색의 기름비를 맞으며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 검정 빛깔로 흠뻑 젖은 그가 흰 블라우스 차림의 레슬리를 찾아가 “석유가 터졌어. 이제 난 부자야”라고 말하던 장면은 여전히 영화 팬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제트의 온몸이 검게 물들지 않고 만일 다른 색이었더라면, 그 오랜 시간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수 있었을까.
검은색. 석유가 상징하는 색깔이다. ‘블랙 골드(Black gold)’, ‘블랙 펄(Black pearl)’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우리에게 석유는 검은색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질이다.
그런데, 하늘이 다 똑같은 파란색이 아니듯 석유도 다 같은 검은색은 아니다. 제트가 시추한 곳이 미국 텍사스가 아니라 대륙 건너 지질 특성이 다른 지역이었다면,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솟구쳐 오르는 석유의 색깔을 고민해봐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검은색에도 엄연히 명도가 있기 마련이며 ‘검붉은색’이나 ‘검푸른색’ 등 다른 색과 함께 어우러지며 채도를 갖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석유는 대체적으로 검지만 자세히 보면 다를 뿐만 아니라, 노란빛이나 붉은빛이 감도는 석유도 찾아볼 수 있다. 색깔만이 아니다. 어떤 석유는 참기름처럼 찰랑거리고, 또 다른 석유는 꿀처럼 끈적이기도 하는 등 그 점도도 각기 다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휘발유, 경유 같은 석유제품들은 이렇게 색깔과 점도가 다른 석유들을 서로 적절하게 섞고 끓이며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석유제품의 색깔은 제품별로 아예 뚜렷하게 구분된다.
울산 석유화학단지에는 세계 최대 규모 수준의 원유 복합정제시설인 SK이노베이션 울산Complex(이하 울산CLX)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전 세계에서 들여온 300여 개 유종(油種), 900개가량의 원유를 분석/분류하는 원유분석실이 있다. 색채, 점도 등 다양한 원유들의 품질이 이곳에서 분석되고 어떻게 섞이는 게 최상인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이 업무를 하는 전문가들은 속칭 유(油)믈리에라 불린다. 원유를 완벽하게 정제하기 위해 다양한 원유의 특성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등 원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 수많은 와인을 감별하고 고객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추천하는 소믈리에와 유사해 ‘유믈리에’라는 별칭이 붙게 됐다. 원유와 와인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원유도 와인처럼 블렌딩(Blending), 즉 배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석유가 모두 검은색이라는 오해는 땅 속에서 뽑아낸 ‘원유(Crude Oil)’로 인해 생겨났어요. 갓 채굴한 원유는 점도가 높아 끈적한 액체 상태이며, 주로 흑갈색이나 암녹색을 띠어요. 이렇게 캐낸 원유는 분별증류(分別蒸溜) 등의 정제 과정을 거쳐 무색 투명한 액체가 되기도 하고, 노란색이나 초록색 등을 띠기도 한답니다.
블렌딩한 각양각색의 원유를 정제하면 다양한 석유제품들이 추출된다. 의류, 플라스틱 등의 원료로 활용되는 나프타(Naphtha)는 맑고 투명한 액체다. 휘발유는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을 띤다. 끓는점을 활용한 원유 정제과정을 통해 가장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아스팔트(Asphalt)는 검은색이다.
사실 아스팔트를 제외한 휘발유, 등유, 경유 등은 정제 직후에는 투명한 무색 액체다. 하지만 휘발유는 노란색인 반면 경유는 좀 더 진한 노란색이고, 고급 휘발유는 비교적 푸른 빛깔을 띤다. 이는 투명한 무색 액체에 제조사가 혼유 사고* 방지를 위해 유종 별로 구분할 수 있도록 색소를 첨가하기 때문이다.
(*) 혼유 사고 : 지정 연료 외 다른 연료를 자동차에 주유한 것으로, 흔히 휘발유 차량에 경유를 잘못 주유했을 때 발생한다. 이처럼 차종에 맞지 않는 기름을 넣으면 출력 저하, 시동 꺼짐 등의 이상 증상이 발생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원유에서 석유제품을 추출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끓는점에 따라 기화된 증기를 모아 다시 액체로 만들어 내는 것. 하지만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해 유믈리에들은 각기 다른 원유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기에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원유를 정제하기 위해선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들이 필요해요! 세계 곳곳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국가/지역별 생산광구에 따라 그 색과 점도가 모두 다르고, 원유의 구성 성분 비율이나 불순물의 종류도 제각각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원유를 똑같은 공정으로 운영한다면, 안정적인 품질의 석유 생산이 불가능해요. 가지각색인 원유를 동일한 품질로 정제하기 위해선 각 원유의 특성에 맞춰 정제 과정에서의 온도나 압력 등의 조건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한답니다.
원유는 같은 생산지에서 채굴하더라도 성상(性狀)의 차이를 보인다. 원유에는 탄소와 수소, 기타 원소는 물론, 그 외에도 황화합물, 질소화합물, 산소화합물, 금속염류 등의 불순물 등이 섞여있다. 불순물 제거는 석유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원유 성분 분석과 그 결과에 맞춘 공정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복잡한 작업의 최선단에 선 주인공이 바로 ‘유믈리에’다.
유믈리에의 원유분석 업무에 가장 핵심적인 설비는 바로 원유분석실의 ‘파일럿 플랜트(Pilot Plant)’다. 특수유리로 만들어진 파일럿 플랜트는 울산CLX의 정제시설인 CDU(Crude Distillation Unit, 상압증류탑)의 축소판으로 다양한 원유를 투입한 후 실제 정제 과정과 똑같이 테스트해 분석 결과를 얻는다.
파일럿 플랜트 분석을 통해 얻은 중요한 자료를 ‘크루드 어쎄이(Crude Assay)’라고 해요. 크루드 어쎄이는 원유와 원유의 증류를 통해 얻은 제품의 수율 및 성상을 모두 모아둔 자료입니다. 이 자료를 활용해 원유의 배합 비율을 조정하고 공장의 운전 조건을 설정하는 등 최종 석유제품 생산을 위한 가이드를 만든답니다.
영화 ‘자이언트’의 배경이 오스트레일리아였다면 제임스 딘의 옷과 얼굴은 훨씬 밝았을 것이고, 중동의 어느 지역이었다면 붉은빛이 보다 더 감돌았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 어떤 색의 석유를 썼더라도 영화는 명작으로서 길이 남았으리라. 하지만 새카만 검은색이 아니었다면 제임스 딘이 석유로 흠뻑 젖었던 명장면이 지금까지 회자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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