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더위에 지쳐 있을 때나 독한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고 몸이 뜨거울 때, 우리는 차가운 물을 수건에 적셔 몸을 닦아 열을 식히곤 한다. 물이 증발하면서 몸의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극지방에선 물이 난방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극한의 추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눈 벽돌로 만든 휴식처인 이글루(Igloo) 벽에 물을 뿌리면 액체 상태였던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서 고체 상태인 얼음으로 변한다. 이때 물이 갖고 있던 열이 방출되는데, 이로 인해 이글루 내부가 따뜻해지는 것이다. 이글루뿐 아니라, 겨울철 종종 들리는 “눈 오는 날이 더 따뜻하다”는 말도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 과학적 원리에서 기인한다. 기체 상태인 수증기가 고체 상태인 눈으로 응축되며 응축열을 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변함없이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질일지라도,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그 용도는 카멜레온처럼 천차만별 변화하곤 한다. 얼핏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전기차의 ‘난방(暖房)’을 위해 ‘냉매(冷媒)’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어떤 원리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자.
❄️ 알고 보면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냉매
시원한 바람을 선사하는 에어컨과 음식을 안전하게 저장하는 냉장고. 그 핵심에는 ‘냉매’라는 특별한 매개체가 숨어 있다. 냉매는 주변 또는 고온의 물질로부터 열을 흡수해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며, 특히 냉방 기기에 사용돼 실내 공기를 시원하고 쾌적하게 만든다.
우리 주변에서도 냉매의 원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뜨거운 여름날 땅이나 도로에 물을 뿌리면 물이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아 시원해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또, 택배로 배송되는 육류나 수산물 상자에 담긴 아이스팩 역시 같은 원리를 이용한다. 내연기관차의 히터 열원으로 쓰이는 엔진 냉각수도 엔진 열을 빼앗아 외부로 배출하는 냉매의 일종이다. 즉, 냉매는 열을 이동시키는 매개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기차에 쓰이는 냉매는 냉방뿐만 아니라 난방까지 겸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그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냉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 환경과 효율을 생각하는 냉매의 끊임없는 진화
냉매는 자연냉매와 합성냉매로 분류한다. 대표적인 자연냉매로는 암모니아(NH₃), 탄화수소(HCs), 이산화탄소(CO₂)가 있다. 초기 자연냉매는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만, 대부분 효율성이 낮고 유독성 및 인화성으로 인해 누출 시 인체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합성냉매다. 1930년대에 개발된 1세대 합성냉매인 CFC(Chlorofluorocarbon, 염화불화탄소) 계열 유기화합물은 인체에 무해하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등 안정성이 높아 오랫동안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CFC 계열 냉매가 대기 중 오존층을 심각하게 파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제연합(UN)은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사용금지 및 규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 몬트리올 의정서: 공식 명칭은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 의정서(Montreal Protocol on Substances that Delete the Ozone Layer)’다. 염화불화탄소 또는 프레온가스, 할론(halon) 등 지구대기권 오존층을 파괴하는 물질에 대한 사용금지 및 규제를 통해 오존층 파괴로부터 초래되는 인체 및 동식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7년 9월 채택하고 1989년 발효했다. 우리나라는 1992년 2월 의정서에 가입, 5월에 발효했다.
이후 냉매로 인한 환경파괴를 줄여 나가고자 하는 전 세계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현재는 4세대 HFO(Hydrofluoroolefin, 수소불화올레핀) 계열 냉매가 이전 세대 냉매를 대체 중이다. 대다수 4세대 HFO 계열 냉매는 PFAS(Perfluoroalkyl and Polyfluoroalkyl Substances, 과불화화합물) 물질로 구성됐다. 하지만 쉽게 분해되지 않는 PFAS가 인체 및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 밝혀지면서, 유럽연합(EU)은 최근 PFAS를 폭넓게 제한하는 규제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다가오는 2026년부터 PFAS 사용 제한 조치가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며, 미국 역시 PFAS를 독성물질로 분류해 규제를 강화 중이다. 따라서 4세대 합성냉매를 뛰어넘는 안전성을 갖춘 차세대 냉매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 자동차용 냉매가 일반 냉매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냉매는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그중 일반 냉매는 사용 환경, 용도, 냉매 공조시스템의 소재, 배관의 크기, 냉매 용량, 목표 성능 등에 따라 사용처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냉동창고나 냉장고에는 자동차보다 많은 양의 냉매를 사용하며, 목표 온도도 낮다.
자동차용 냉매는 주로 3세대 HFC(Hydrofluorocarbon, 수소불화탄소) 계열 냉매가 활용됐으나, 높은 지구온난화지수(GWP)로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 냉매는 일반 냉매보다 빠른 속도로 개발돼 왔다.
내연기관차는 엔진의 폐열을 이용해 난방을 하지만, 전기차는 배터리를 동력으로 사용해 많은 열이 발생하지 않기에 다른 방식 즉, 자동차 공조시스템(HVAC)을 활용해서 난방을 해야한다. 이 때문에 전기차 냉매는 기존 자동차 냉매보다 더 높은 효율 및 환경친화성을 요구받으며, 이에 대응하는 지속적인 연구 개발이 진행 중이다.
❄️ 자동차 공조시스템(HVAC)은 무엇일까?
자동차의 공조시스템, ‘HVAC(Heating: 난방, Ventilating: 환기, and Air Conditioning: 공기 조절)’은 에어컨이 만드는 시원한 공기와 히터가 만드는 따뜻한 공기를 조합해 차량 내부로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전기차의 경우, 공조시스템은 배터리를 포함한 전체 차량 구성 요소의 온도를 종합적으로 제어하는 열관리 시스템에 통합된다.
탑승자가 체감하는 공조시스템의 기능은 내연기관차 및 전기차를 구분 짓는 자동차 동력원과 관계가 없지만, 이를 구현하는 기술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먼저 에어컨 시스템을 살펴보면,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모두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가정용 에어컨과 마찬가지로 냉매가 순환하며 차량 내부의 열을 흡수해 시원하게 만든 후, 흡수한 열을 차량 외부로 내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다만, 냉매 순환에 필요한 압축기(컴프레서)의 동력을 얻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내연기관차는 엔진과 연결돼 함께 작동하는 반면, 전기차는 공조시스템의 전기 모터를 사용해 작동한다.
차이가 가장 큰 부분은 히터다. 앞서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내연기관차의 히터는 엔진 열을 이용해 난방을 하기 때문에 엔진이 작동하는 한 꾸준히 따뜻한 바람을 실내로 공급할 수 있다. 반면에 엔진이 없는 전기차는 별도의 열 발생 장치가 필요하다. 즉, 히터 작동에 필요한 열을 얻기 위해 차에 충전된 전기 에너지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전기차에서 공조시스템의 효율은 주행 가능 거리와 직결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 전기차 히터의 열원, PTC 히터와 히트 펌프의 차이
전기차 히터의 열원은 크게 PTC 히터와 히트 펌프로 나뉜다. PTC 히터**는 전기 에너지를 직접 열에너지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효율이 낮다는 단점을 지닌다. 히트 펌프***는 에어컨과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지만 작동 방식이 반대다. 가정용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실내기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실외기를 맞바꿔놨다고 생각하면 쉽다.
(**) PTC 히터(positive temperature coefficient heater): 설정온도에 따라 발열량을 조절하는 장치. 온도가 적정 이상으로 올라가면 자체적으로 전류의 양을 줄여 적정 온도를 유지시킨다.
(***) 히트 펌프(heat pump): 냉매의 발열 또는 응축열을 이용해 저온의 열원을 고온으로 전달하거나 고온의 열원을 저온으로 전달하는 냉난방장치
히트 펌프는 에어컨처럼 냉매를 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전기 모터만 있으면 작동한다. 일부 장치 추가 시 에어컨 구조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PTC 히터보다 효율이 높다. 또한, 히트 펌프와 에어컨을 통합하면 공조시스템의 크기 및 무게를 줄일 수 있으며, 이는 전기 에너지 소비 감소와 주행 거리 증가로 이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에어컨과 히트 펌프를 통합하는 것만으로는 공조시스템 효율 향상에 한계가 있다. 기존 에어컨용 냉매는 냉방 성능이 뛰어난 반면 난방 성능은 부족하기 때문에, 두 가지 성능을 모두 만족하는 차세대 냉매 개발이 필요하다. 올해 1월,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SK엔무브와 현대자동차그룹이 업무협약을 맺고 개발키로 한 차세대 차량용 냉매는 이러한 환경 변화와 시장 트렌드를 반영한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 SK엔무브가 선보이는 차세대 냉매, HVAC 플루이드(Fluids)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날로 엄격해지는 규제에 발맞추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의무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냉매 시장도 다르지 않다. 국가 산업 및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차세대 냉매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에 SK엔무브와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1월 25일 ‘차세대 냉매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SK엔무브는 차세대 차량용 냉매를, 현대자동차그룹은 해당 냉매를 사용하는 차량 열관리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SK엔무브가 개발 중인 차세대 냉매 ‘HVAC 플루이드’는 PFAS 규제에 대응한 냉매다. 기존 차량용 냉매에 난방 성능을 강화한 제품으로, 동절기 전비(電比)를 높여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
HVAC 플루이드는 HVAC 시스템에서 열 운반을 담당하는 냉매, 냉동기유 등의 물질로 구성된다. 냉동기유는 마찰, 마모, 저감 능력 등의 윤활 성능뿐 아니라 냉매와의 호환성도 중요하다. 이는 냉동기 내의 압축기가 작동유체인 냉매를 흡입해 압축하고, 냉매와 적절히 혼합돼 시스템 안을 순환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냉동기유는 냉매와의 높은 호환성으로 시스템 안정성을 높인다.
외부 연구기관 평가 결과에 따르면, SK엔무브와 현대자동차그룹이 개발하는 냉매는 기존 냉매 대비 난방 성능이 30% 이상 개선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양사는 해당 차량용 냉매를 내연기관차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개발할 예정이다.
SK엔무브는 차세대 냉매 개발을 통해 강화된 글로벌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가전, 빌딩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자 SK이노베이션 환경과학기술원 에너지 세이빙 연구센터와 함께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에너지 효율화 기업(Energy Saving Company)으로서의 지위를 한층 공고히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