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6년 한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주제 중의 하나는 금연입니다. 가장 흔한 ‘새해 결심’이란 얘기죠. 금연을 마음먹은 이 가운데 상당수는 작심삼일에 그쳐 다시 담배를 피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패할 게 뻔하더라도 시도는 한번 해보는 게 사람의 심리인가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담배로 인한 화재
17세기 초 일본을 거쳐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담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등장과 함께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게 엇갈린 핫한 기호품으로 자리잡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담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담배는 1623년(광해군 15년) 실록에 처음 등장합니다.
“동래(東萊) 왜관(倭館)에 화재가 발생하여 80칸을 모두 태웠다. (임술년에도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왜인들이 담배를 즐겨 피우므로 떨어진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난 듯하다.)”
담배로 인한 화재 기록은 그 뒤로도 종종 있습니다. 1692년(숙종 18년) 담배로 인해 재실과 가까운 곳에서 불이 나 병조의 낭관이 파직돼 벌을 받았었습니다. 1717년(숙종 43년)에는 전의현(현 세종시 전의면‧전동면 일대)에서 담배로 인한 화재가 나 여러 고을 집들이 불에 타고 덕산의 병부(兵符)도 소실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책임자들이 벌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담배가 엄중히 금지됐습니다. 하지만 흡연을 막을 수는 없었고, 담배로 인한 실화도 계속됐습니다. 심지어 실록에 나온 담배에 관한 마지막 기록도 비슷한 건이었습니다.
“방금 융릉 영(隆陵令) 한창리의 보고를 접수하였는데, 음력 이달 28일에 일본인이 유람차 본릉에 왔는데 그들이 피운 담배꽁초의 불에 본 능의 곡장(曲墻) 안과 계체(階砌)의 사초(莎草)가 몽땅 불탔으나 능 위는 안녕하다고 하였습니다.” (1907년, 고종 44년)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묘입니다. 일본인들이 왕릉 뒤를 둘러싼 나지막한 담(곡장)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무덤 앞 계단과 섬돌 주변 풀이 다 불에 탔다는 기록인데요.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해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던 당시 조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적으로 기록되는 담배
그 외에도 담배는 실록에서 주로 부정적으로 언급됩니다.
담배 전래 초기인 1628년(인조 6년) 광주 선비 이오는 상소를 올렸는데요. “만주족(청나라)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제신(諸臣)이 비국에 모여도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울 뿐이고, 진영에 있는 곤수(閫帥)들도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나 합참과 같은 군 최고 수뇌부들이 일은 안하고 담배나 피고 노닥거린다는 것입니다.
1775년(영조 51년)에도 집의 유의양이 “비국(備局)에서는 날마다 모여서 군국기무(軍國機務)에 대한 것은 듣지 않고 오직 담배(煙茶)나 몇 대씩 피우고 돌아갈 뿐”이라며 관리의 기강 문란을 담배와 연결시켜 왕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담배 재배중인 경작지 / 출처 : pixabay>
담배의 해악을 주장하는 쪽의 가장 큰 논거는 담배 때문에 곡식 소출이 줄어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반영해 영조는 1732년 영남‧호남‧충청 3남 지방 관리들에게 “양전(良田)에다 담배 심는 것을 금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2년 뒤 사헌부 장령 윤지원은 “담배의 해독은 술에 비하여 더욱 심하다”며 담배의 재배와 제조 과정을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흡연을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본 숙종과 영조는 중요한 제사를 앞두고 술과 함께 담배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사랑한 임금, 정조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정조는 달랐습니다. 규장각 초계문신들에게 ‘모든 백성이 담배를 피우도록 할 방안을 제시해 보라’(남령초 책문)는 과거시험 문제를 낼 정도로 담배 사랑이 유난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골초였던 정조는 즉위 뒤 기우제 때 술만 금지하고 담배는 허락하도록 합니다. 제사를 앞두고 금연‧금주를 하는 이유는 마음을 재계하기 위한 것인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면 마음이 정제되기는커녕 괜히 마음만 수고롭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왕이나 황제도 막지 못한 담배
담배는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638년(인조 16년) 실록에는 조선 사람이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으로 담배를 몰래 들여갔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돼 크게 힐책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담배에 대한 소개글과 더불어 청나라에서는 황제가 ‘재물을 소모시킨다’며 담배를 엄금한다고 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인조는 그 몇년 뒤 담배 밀무역을 엄벌하라는 명령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비판하는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곡식 심을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담배와 차의 경작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끊이지 않았는데요. 정조는 “완전한 금지는 어렵다”, “가볍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청나라 황실을 방문했었던 허적 / 출처 : 위키피디아>
1666년(현종 7년) 실록에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청나라 황실의 조회에 참석해서 보고 온 바를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조회에 참석한 신하들이) 절하는 의절과 머리를 조아리는 등의 일은 가지런했습니다만, 마음대로 포근하게 앉기도 하고 담배를 마구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불과 20~30년 전만해도 담배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는데, 황제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전부 모이는 조회 때 담배를 피워대는 이가 있을 정도로 일반화됐더란 얘기입니다. 조선에서 아무리 왕명으로 금해도 금할 수 없는 게 담배였는데, 청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왕이나 황제도 못 막은 흡연이라지만 세상사 모두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일 아닐까요? 또 건강과 가족은 왕이나 황제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올해도 금연 결심을 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 좋은 결과 만들어내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