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발전으로 선경은 명실상부한 ‘섬유기업집단’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한 원사 가공–후처리 일괄생산 기업 울산직물(1971년 ‘선일섬유’로 상호 변경), 1971년부터 가동한 현대식 봉제 기술을 가진 ‘선산섬유’를 설립한 것입니다. 1962년 4만 달러에 불과하던 선경 직물의 수출은 1968년 360만 달러, 1969년에 833만 달러에 육박합니다.
이렇듯 SK에너지의 모태, ‘선경’은 대한민국 굴지의 섬유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대한민국의 부흥기를 함께했던 선경직물! 다음 화에서는 선경 직물이 에너지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던 1970년대를 함께 돌아보겠습니다.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제시해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제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입니다. 섬유공업에서 석유정제사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성취해 나가는 데에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제적 기업으로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신년사 中 |
거의 창업 선언에 견줄만한 놀라운 발표였는데요. 당시에는 故 최종현 회장의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故 최종현 회장의 계획대로 SK에너지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중이지만 말이죠. ^^
‘수직계열화’란 원료로부터 최종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공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이릅니다. History#1 선경 직물의 탄생과 성장(링크)에서 선경이 독자적인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 능력을 갖추었던 것을 기억하실 텐데요. 원사 생산자에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직계열화는 사실 이때부터 시작된 것과 다름없습니다. 폴리에스터 원사의 원료인 DMT 가격이 제1차 석유파동으로 폭등했을 때에는 DMT공장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죠.
DMT란? ‘디메틸텔레프탈라이트’의 약자로 폴리에스터 계열 섬유의 주요 원료. |
당시 건설하려던 DMT공장은 1973년 5월에 설립한 ‘선경유화’의 이름으로 진행됩니다. 아쉽게도 추진은 미뤄졌지만, 수직계열화를 위한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선경은 1973년 7월에는 ‘선경석유’를 설립,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1일 15만 배럴의 원유공급 확약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합작사가 사업에서 철수하고 막심한 손해를 입습니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약이 완전히 파기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는데요.
꼬박 1년이 지난 1974년에는 3개국 6개 기업과 합작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합니다. 관계국 정부의 승인까지 추진했지만,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역시 실현되지 않았지만, 선경은 여기서 주춤하지 않고 수직계열화를 위한 의지를 다집니다.
신년사에서 수직계열화 의지를 밝혔던 1975년부터는 대한민국 수출 산업이 회복세를 찾습니다. 이에 따라 주춤했던 선경의 경영실적도 호전되었는데요. 선경의 1975년 직물 부문 흑자는 5,400만 원, 원사 부문은 11억 8,200만 원을 기록합니다. 전년도인 1974년 대비 178% 증가한 경영실적입니다. 1976년에 이르러 선경의 주력기업 매출 총액은 무려 1,160억 6,000만 원, 창업 이래 처음으로 1,000억 원대를 돌파합니다.
수출 실적도 급신장합니다. 1977년 ㈜선경의 해외 지사는 24개, 수출국은 80여 개에 다다랍니다. 1977년 ‘2억 달러 수출탑’, 1979년 ‘3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할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1980년 8월 19일, 대한석유공사의 경영 주체였던 미국 걸프가 보유 지분 50% 전부를 양도하고 철수합니다. 이는 1978년 발발한 제2차 석유파동으로 걸프가 기대한 수익 확보가 어려워지고, 주식 이양 조건 이행 시기가 다가온 탓에 17년 만에 공식 철수한 것인데요. 정부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대한석유공사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사안을 1980년 10월 공개합니다.
▶ 소요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
▶ 증설 및 비축사업을 계획 기간 안에 완공시킬 수 있는 자금조달 능력 ▶ 산유국에 대한 투자유치 능력 ▶ 정유회사의 경영관리 능력 ▶ 국가 기관산업으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업의 성실성 ▶ 산유국과의 교섭 능력과 실적 ▶ 1980년 10월, 정부가 제시한 대한석유공사 인수자격 기준 요약 |
이 발표로 재계는 크게 술렁입니다. 발표 즉시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인수를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데요. 어느 기업이 인수하느냐에 따라 재계의 판도가 바뀌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선경 역시 이 각축전에 뛰어드는데요
재계 10위 안팎을 맴돌던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리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80년 선경의 대한석유공사 인수는 10년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1973년 정유공장 설립 추진 이후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석유외교’를 이어갑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을 대한민국에 초청하는가 하면 199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야마니’ 석유상의 초청을 받기도 합니다. 선경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야마니 석유상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OPEC 국가에도 영향력이 있던 석유상이었습니다. 그는 故 최종현 회장에게 ‘대한민국에 필요한 만큼의 원유를 증량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고 이 역시 선경의 대한석유공사 인수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석유외교로 선경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습니다. 1980년에는 하루 5만 배럴, 1981년에는 하루 7만 배럴, 1982년에는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받기로 한 것인데요. 같은 해 최규하 대통령이 산유국을 찾아가 석유외교를 벌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삼성물산과 남방개발 등이 하루 5천 배럴 정도의 도입에 성공한 것이 큰 성과로 여겨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엄청난 규모의 장기 계약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1978년부터 걸프 철수에 관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테스크포스를 구성해 미리 대비했던 일화, ‘알 사우디 은행’에 1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온 사실 등은 수직계열화를 위한 선경의 오랜 준비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선경의 수직계열화는 1991년 SK 울산CLX 준공으로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그간 있어온 각고의 노력을, SK에너지가 지금도 열심히 이어가고 있어요. 다음 화에선 선경이 인수한 이후 점차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유공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열정 하나로 해외 석유자원 개발에 힘 쏟았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많이 기대해주세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