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영웅들” - SK이노베이션 계열 구성원의 이야기
2024.12.20
SK그룹이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다양한 그룹 계열사가 신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SK에너지는 석유제품 수출 1위를 견인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기업의 위치를 견고히 하고 있는데요.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60년 동안, SK에너지는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어떤 회사였고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여러분께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SK에너지의 성장사를 들려 드립니다.
이야기는 1953년 7월 휴전 이후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대한민국으로 돌아갑니다!
1953년 10월, 폐허가 된 수원시 평동에 자그마한 직물회사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이에요.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선경직물공장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몇 안 되는 직원과 함께 돌과 자갈을 직접 날랐어요. 공장 내 고철을 팔아 첫 생산을 시작한 선경 직물, 구성원 조업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조직문화를 바탕으로 제1공장을 복구한 지 1년 만에 제2공장도 복구합니다.
1955년, 급격한 경기침체로 국내 직물 시장은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는데요. 입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했던 시절이어서 소비자의 구매욕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선경직물 제품만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는데요. 바로 선경 직물이 만들어낸 ‘닭표’ 인조견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복 안감은 대부분 재단 전에 물세탁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닭표’ 인조견은 물 세탁할 필요 없이 바로 재단이 가능했기 때문에 상당히 획기적인 상품이었습니다. 조직이 조밀하고 표면이 매끄러워 품질도 최고였어요. 이처럼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故 최종건 회장의 ‘품질제일주의’ 덕분이었습니다. 요령이나 꼼수 대신 품질로 경쟁하자는 故 최종건 회장의 의지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닭표 인조견의 우수한 품질로 선경 직물은 국내 굴지의 견직물 회사를 제치고 당당히 부통령 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는 닭표를 유명 브랜드로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했어요. 그 결과 동대문 시장에는 ‘닭표 있어요?’라는 말이 끊이질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도매상들이 직접 현금을 들고 공장으로 찾아와 닭표 인감이 나오기만을 목이 빠지라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가짜 닭표가 활개를 치자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먼저 나서 단속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당시 멋쟁이 신사라면 모두 품 안에 닭을 품고 있었고 예비 신부는 봉황을 품었습니다. 선경직물의 ‘봉황새 이불감’ 이야기인데요. 봉황새 수를 놓은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것처럼 팔렸습니다.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될 정도였답니다. 닭표와 봉황새 이불감의 연이은 히트로 선경직물은 4개의 공장과 염색가공공장을 신축합니다. ‘양단’, ‘뉴똥’이라는 또 다른 히트작을 발표했습니다.
발표하는 브랜드마다 인기를 휩쓸던 선경 직물은 1959년, 나일론이 아닌 폴리에스터 직물을 도입하기로 합니다. 선진국에서 폴리에스터 섬유가 더 주목받는 시기여서 선경 직물뿐만 아니라 많은 국내 업체가 폴리에스터 섬유 시장에 뛰어들던 시기였습니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습니다. 나일론 섬유와 달리 120도의 고온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염색 탱크도 확실하게 밀폐되어야 했기 때문에 난관이 많았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선경 직물의 폴리에스터 직물은 예의 나일론 직물과 마찬가지로 호평을 받습니다.
1960년 4월 19일과 1961년 5월 16일, 역사가 기억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혼란이 가중되던 1960년대 초반은 선경 직물에게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정부의 외환 부족으로 인한 원사 수입 감축, 자금경색 등으로 직물 시장 전체가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직물 성수기인 10월에도 정상적인 회복은 어려웠는데요. 선경 직물은 이러한 불황의 탈출구로 ‘수출’을 선택합니다. 1961년 11월, ‘선경 직물 서울사무소’를 확대 개편하면서 수출을 위한 첫 발을 내딛는데요.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대기업 계열 직물회사도 수출이 어려웠던 당시에 중소기업 수준의 선경 직물이 수출에 뛰어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 무역상은 선경 직물 안감에 ‘Made in Japan’이라 표기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니 당시 ‘수출’이라는 장벽이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1962년 4월, 선경 직물은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해외 수출에 성공했습니다. 홍콩에 닭 표 인조견 10만 마를 처음으로 수출하며 우리나라를 직물 수출국 반열에 올려놓은 쾌거를 이루죠! 홍콩 무역회사에 발송했던 닭 표 안감 견본이 낳은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1962년 일 년 동안 선경 직물은 4만 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립니다.
거대한 수출실적에도 불구하고 직물업계의 불황은 계속됩니다. 힘겨운 시기에도 선경 직물은 미래를 내다보고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을 시작합니다. 선견지명과도 같은 원사공장 준공은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준공,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으로 이어집니다. 두 공장의 완성은 대한민국 원사 생산 능력을 48톤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중 선경 직물의 생산량은 26%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으로 선경은 명실상부한 ‘섬유기업집단’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한 원사 가공–후처리 일괄생산 기업 울산직물(1971년 ‘선일섬유’로 상호 변경), 1971년부터 가동한 현대식 봉제 기술을 가진 ‘선산섬유’를 설립한 것입니다. 1962년 4만 달러에 불과하던 선경 직물의 수출은 1968년 360만 달러, 1969년에 833만 달러에 육박합니다.
이렇듯 SK에너지의 모태, ‘선경’은 대한민국 굴지의 섬유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대한민국의 부흥기를 함께했던 선경직물! 다음 화에서는 선경 직물이 에너지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던 1970년대를 함께 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