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탄소 배출 저감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완성차업계는 내연기관 사업 모델의 축을 전기차로 옮기는 추세이며, 전기차가 친환경 이동 수단으로 주목받으면서 글로벌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판매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곧 전기차에서 배출되는 ‘사용 후 배터리’가 함께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해 환경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용 후 배터리 배출은 오는 2030년까지 10만여 개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흔히 ‘폐배터리’라고 부르는 사용 후 배터리는 배출된 뒤에도 높은 활용가치가 있다. 폐기물이 아닌 소중한 자원으로 다시 쓸 수 있는 사용 후 배터리 시장의 성장 전망, 그리고 재사용·재활용 방식과 사례에 대해 알아보자.
01 | ‘기회의 땅’이 될 사용 후 배터리 시장
사용 후 배터리에는 충전 성능이 남아있다. 아직 다른 용도의 배터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다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잔여 충전 성능이 낮더라도 사용 후 배터리에는 리튬이나 니켈 등 부가가치가 높은 소재가 포함되어 있어 활용 가치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사용 후 배터리는 고부가가치 자원으로 꼽힌다. 이에 세계 각국의 기업은 사용 후 배터리를 활용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으며, 시장 성장에 대한 업계의 기대치도 높다.
2021년 10월,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SNE 리서치는 “전 세계 사용 후 배터리 시장은 2050년까지 600조 원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기차 시장과 함께 사용 후 배터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의 경우 2020년 12월 31일까지 있었던 ‘사용 후 배터리 반납 의무 조항’으로 전기차를 구매할 때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은 구매자들은 폐차 시 배터리를 각 지방자치단체에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오로지 ‘보관’의 권한만 있었던 지방자치단체는 반납된 배터리를 기업에 판매하거나 활용할 수 없었다. 환경오염 우려로 폐기할 수도, 매각할 수도 없이 사용 후 배터리를 보관만 해온 것이다.
지난해 정부는 사용 후 배터리 관련 사업 활성화를 위해 전국 4개 권역에 ‘미래폐자원 거점수거센터’를 구축했다. 또한, 올해 1월 1일부터 지방자치단체에 반납된 배터리를 민간과 거래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했다. 현재 미래폐자원 거점수거센터는 배터리 매각 평가 기준을 수립하고 있으며, 추후 기준이 마련되면 기업은 지방자치단체에 보관된 사용 후 배터리를 구입해 각종 산업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사용 후 배터리 시장은 기업 입장에서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분야다. 자원의 재활용을 통한 원가 절감이 가능하고, 배터리 분야 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주는 데다 탄소중립이라는 사회적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른 사용 후 배터리 시장으로 자동차/배터리 기업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02 | 사용 후 배터리를 다시 쓰는 방법, ‘재사용’과 ‘재활용’
사용 후 배터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먼저 충전 성능이 얼마나 남았는지 판별한다. 배터리 평가 과정을 거쳐 잔존 성능을 확인한 이후에는 배터리를 ‘재사용’할지, ‘재활용’할지 구분한다. 재사용과 재활용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방법이다. 재사용은 배터리를 다른 용도의 배터리로 다시 쓰는 방식이며, 재활용은 배터리에서 니켈, 망간, 리튬 등의 소재를 회수해 새 배터리 제작에 쓰는 방식이다. 사용 후 배터리에 아직 충전 성능이 남아있고 다른 곳에 이용 가능한 경우에는 주로 재사용 방식을 채택하며, 배터리로 쓰지 못할 만큼 충전 성능이 낮아진 경우에는 분해 후 소재를 추출해 재활용한다.
사용 후 배터리 재사용의 대표적인 사례는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저장장치시스템)이다. 팩(Pack) 단위로 묶인 여러 개의 사용 후 배터리를 연결해 ESS를 구축, 전력을 저장해두고 사용하는 이 방식은 배터리를 새로 만들 필요없이 전력 저장고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BMW는 전기차 i3의 중고 배터리를 가정용 및 산업용 ESS로 만들어 판매 중이다. 지난해에는 영국 유명 록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월드투어 콘서트장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40개 이상의 i3 중고 배터리를 ESS로 제공하는 파트너십을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0년 세계 최초로 양산형 전기차 ‘리프(Leaf)’를 출시한 일본의 닛산도 빠르게 사용 후 배터리 재사용 시장에 진출했다. 닛산은 지난 2018년부터 리프의 중고 배터리를 세계 각지의 배터리 기업이 ESS로 만들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 축구 경기장에는 닛산의 리프 중고 배터리 148개로 만든 ESS가 설치되기도 했다.
▲ 닛산 리프 중고 배터리로 만들어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 ESS – 이미지 출처 : 닛산
배터리의 소재를 추출해 새 배터리 제작에 쓰는 재활용 방식은 부가가치가 높은 소재의 자체 조달을 가능케 하고, 수입 의존도를 낮춰 수급을 안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배터리 소재를 재활용할 경우 소재의 신규 채굴을 줄여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용 후 배터리 재활용 기술은 난도가 높아 아직 초기 단계이나, 세계 각국의 기업이 기술 연구 개발에 나서고 있다.
▲ 뒤젠펠트가 사용 후 배터리에서 회수한 흑연 – 이미지 출처 : 뒤젠펠트
독일의 화학기업 ‘뒤젠펠트’는 분해/파쇄된 사용 후 배터리로부터 흑연, 망간, 니켈, 코발트, 리튬 등을 얻는 기술을 개발했다. 뒤젠펠트는 이 기술을 이용하면 배터리 구성 요소의 96%를 회수해 새로운 배터리에 재활용할 수 있으며, 채굴을 통해 배터리 소재를 얻는 방식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최대 40% 감소한다고 밝혔다.
03 | 사용 후 배터리, SK이노베이션은 어떻게 다시 쓰고 있을까?!
▲ SK온은 11월 29일, 전기차에서 사용한 배터리를 이용해 ‘친환경 ESS’를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SK온은 한국전기안전공사, SK에코플랜트, ㈜케이디파워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SK서린빌딩에서 재사용 배터리로 ESS를 구축해 건설현장에서 운영하는 4자간 협약을 맺었다. (왼쪽부터) 한국전기안전공사 김한상 신재생안전처장, SK온 손혁 Biz. Partnership그룹 사업부장, SK에코플랜트 이태희 에코스페이스PD, ㈜케이디파워 이양수 대표이사가 협약식을 마치고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또한 사용 후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자회사인 SK온은 기아자동차 ‘니로EV’의 사용 후 배터리 6개를 재사용한 300KWh(킬로와트시)급 ESS를 구축하고, 이를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SK에코플랜트 아파트 건설 현장에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SK온은 SK에코플랜트와 함께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기반 ESS의 내구성과 안전성, 배터리 효율 및 전력 요금 절감 효과를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유관기관과 함께 실증할 예정이다.
▲ SK이노베이션이 사용 후 배터리에서 추출한 수산화리튬
뿐만 아니라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사용 후 배터리 양극에서 NCM811* 등과 같이 하이 니켈(High Ni) 배터리의 양극재 제조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수산화리튬(LiOH) 형태로 리튬 회수가 가능한 독자기술을 개발했다. 사용 후 배터리 재활용 기술에 있어 양극에서 회수한 리튬, 니켈, 코발트 등의 핵심 물질을 추출해내는 것은 이미 상용화돼 있지만, 리튬을 고순도의 수산화리튬 형태로 회수할 수 있는 기술은 지금까지 없었다. SK이노베이션이 개발한 수산화리튬 회수 기술을 활용하면 니켈, 코발트 등의 핵심 원재료를 보다 많이 고순도로 추출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NCM 811 : 니켈-코발트-망간 비율이 ‘8:1:1’인 배터리
사용 후 배터리에서 추출한 수산화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을 활용하면 탄소배출권 확보에도 유리하다. SK이노베이션의 수산화리튬 추출 기술은, 광산이나 염호에서 리튬을 채굴하고 가공할 때보다 탄소발생량을 40~70%까지 줄일 수 있어, 관련 업계에선 SK이노베이션의 수산화리튬 추출 기술을 통한 탄소배출량 감소가 유의미하다고 평가한다.
* 본 콘텐츠는 Magazine SK의 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